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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쩍이는 갑옷, 두툼한 양날의 검과 위협적인 긴 창이 격돌하는 기사들의 영웅적인 이야기는 남자들의 오랜 로망입니다.

유럽 중세 배경의 영화는 영주와 기사들 이에 더해 으스스한 안개가 어우러져 마법마저 당연히 있을법한 시대 배경을 만들어 주었고 그들이 만든 이야기들은 그대로 역사와 전설로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영웅과 그들의 역사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있지만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잘 모르시거나 들어봤지만 딱히 보기에는 선 뜻 내키지 않는 작품이 킹덤 오브 헤븐(Kingdom Of Heaven)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보면 볼수록, 알면 알 수록 더욱 감탄하게 되는 장점이 많은 영화인데요 개인적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이 영화의 빛나는 장점을 짚어보겠습니다.

그들이 지키려 했던 왕국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정보

개요 : 2005. 5. 4 (DC 재개봉 2020. 11. 11) / 15세 관람가 / 액션 / 영국 / 러닝타임 137분 (감독판 189분) / 20세기 폭스 배급

감독 : 리들리 스콧

출연 : 올랜도블룸(발리안), 에바그린(시빌라), 리암니슨(고프리), 제레미아이언스(티베리아스), 에드워드 노튼(보두엥 4세)

누적관객 : 148만 명

 

믿고 보는 감독의 역사극

이 영화는 실화입니다. 시작할 때 의례 보이는 Based on true story라는 안내 자막이 없어도 주인공인 발리안과 시빌라 공주, 예루살렘의 왕이었던 보두엥 4세, 시빌라 공주의 남편이자 전쟁광이었던 기 드 뤼지냥, 전쟁의 불씨 샤티옹, 그리고 이슬람의 왕 살라흐 앗 딘(살라딘) 등 주요 인물들 모두 역사에 실존했던 인물들이며 중심 스토리도 역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성지를 수호하고 순례자를 보호한다는 명분하에 이루어졌던 십자군 전쟁 중에서도 제3차 원정 직전(1187),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이슬람 백성 습격으로 크게 노한 살라딘의 예루살렘 공략을 저지하고 협상을 통해 예루살렘을 지켜낸 이벨린의 영주 발리안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스토리 전개상 필요에 의해 살을 붙인 극히 소수의 부분을 제외하고는 당시 예루살렘이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까지 공존했던 공간으로 통치자 보두엥 4세는 이를 보장하여 상호 존중으로 번영을 추구했던 점, 십자군이 강성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고 있던 상황에 기와 사티 옹의 이슬람 습격으로 전쟁이 촉발된 과정과 살라딘의 전술로 십자군이 대패하여 발리안이 벌였던 최후의 방어 등 모든 이야기가 그 자체가 역사입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1992년 1492 콜럼버스를 시작으로 2000년 막시무스의 이야기를 그려낸 글래디에이터로 극찬을 받은 이후 다시 킹덤 오브 헤븐의 제작과 연출을 맡아 더욱 숙성된 연출력을 보여주는데 글래디에이터가 예쁨 예쁨으로 뽀샵된 톤을 보여줬다면 킹덤 오브 헤븐에서는 거칠고 투박한 미장센으로 있는 그대로의 극한의 전쟁터를 묘사해 줍니다.

생각해 보면 시대극도 그렇지만 2002년 개봉된 블랙 호크 다운에서도 볼 수 있듯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의 리얼리티 넘치는 연출은 독보적이라 생각하는데 이후 로빈후드(2010),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2014), 최근의 라스트 듀얼 : 최후의 결투(2021)까지 꾸준한 시대극 필모그래피를 보여주시며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37년 생) 어마무시한 창작 능력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중세 전투의 레퍼런스

이 영화를 한마디로 명작이라 부르길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전투 Scene입니다.

전투 준비의 치밀함과 더불어 상반되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초조함, 전투의 시작과 전개 과정의 개연성, 멋 부리거나 오버된 액션이 없는 둔탁하고 지저분한 살벌함이 실제 전쟁의 한복판에서 함께 허우적대고 있는 나 자신에 모골이 송연할 정도입니다. 특히 약점이었던 북쪽 성곽이 무너지며 이곳을 넘으려는 살라딘의 병력과 이곳을 막아야만 하는 예루살렘 백성들의 처절한 백병전은 다시없을 높은 완성도의 촬영도 촬영이지만 연기하는 모든 조, 단역 배우들 어느 하나 건성인 사람 없이 정말 죽기를 각오한 당시의 사람들처럼 서로 뒤엉켜 치고, 베고 물어뜯고 탈진하여 울부짖다 죽어가는 지옥 그 자체를 느끼게 해 주는데 이러한 공성과 수성전의 미장센들은 많은 영화의 레퍼런스로 회자되며 우리나라 영화 안시성(2018)에서도 오마주처럼 연출된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을 좋아하는 이유가 에이리언 시리즈 등의 Sci-fi 영화가 그러하듯 꼭 필요한 부분의 CG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실사와 세트 제작 기반의 촬영이기 때문에 그 생생한 현장감에 감탄하게 되는데 이 영화에서는 특히나 대규모 병력의 엑스트라 동원과 그들의 완벽한 복장이 돋보였던 보두앵 4세의 십자군과 살라딘의 이슬람 대군이 조우하는 장면은 그 자체로 다시없을 명장면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일방적인 관점을 넘어서는 공정함

성전(聖戰)을 표방하며 예루살렘을 차지하였지만 그들 십자군의 방법과 통치는 과연 그러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당시 부패하고 이교도 배척에만 몰두하였던 기독교의 폐단을 조명하는 동시에 이슬람과의 공존을 통해 바람직한 왕국을 유지하려 했던 보두앵 4세 같은 예루살렘에 정착한 십자군 세력이 모습도 함께 조명하고 있는 부분이 좋았습니다.

특히 분열하던 이슬람 세력을 통합한 리더로서 살라딘의 면모도 엿볼 수 있었는데 실제 남겨진 기록에 의하면 카리스마 넘치는 장수의 모습보다는 학자풍의 진지한 풍모를 지녔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영화에 그려진 것처럼 대화와 외교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또 한 명의 영웅으로 십자군 사이에서도 인정받았던 인물이라 합니다.

이 처럼 이 영화는 십자군과 이슬람 특히 그동안의 십자군의 시각과 관점으로만 이야기하는 우를 범하지 않는 작품이라 더욱 거부감 없이 감상에 빠져들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명장면과 명대사

영화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부분이 없습니다. 주인공이나 출연진의 의도는 어떨지 모르지만 대사 자체가 담백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대표하는 행동과 결부되어 나오는 대사들은 무겁게 다가옵니다.

죽어가는 고프리가 발리안에게 작위를 수여하며 나오는 기사도의 맹세(The Knight's Oath) 중

- 늘 용기 있게 선을 행하라(Be brave and upright that God may love thee)

- 약자를 보호하고 의를 행하라(Safeguard the helpless and do no wrong)라 했던 내용이나

천신만고 끝에 예루살렘에 도착,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골고다 언덕을 찾아가 자살한 아내와 살인을 저지른 자신의 죄를 고하며 사함을 받고자 하였으나 대답 없음에 낙심하며 (간직했던 아내의 목걸이를 땅에 묻으며) 했던 말

- 당신이 내 마음속에 있는데 어떻게 당신이 지옥에 있을까?(How can you be in hell when you're in my heart?)

무엇보다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수성하는 발리안과 그의 백성들을 보며 함락이 쉽지 않음을 느낀 살라딘이 협상에 응하게 되고 예루살렘을 넘기면 백성들을 해치지 않고 돌려보내겠다는 조건에 합의하자 발리안이 살라딘에게 묻습니다

- 당신(살라딘)에게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입니까?

- 아무것도 아니지(Nothing!)  모든 것이기도 하고(Everything!)

이 대사에서는 많은 것을 느꼈는데 한 낫 명분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귀중한 사람들이 죽어간 수많은 역사이기도 하지만 뛰어난, 지혜로운 리더로 인해 이념과 극단을 넘어 이해와 협의를 이룰 수 있다는 결론이 그것이었습니다.

 

킹덤 오브 헤븐은 결과적으로 두 번을 봤었습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최초 극장판도 압도적인 전쟁 Scene으로 매우 만족하였는데 49분이 늘어난 무려 3시간에 육박하는 감독판을 봤을 때의 느낌과 감동은 전혀 다른 영화라 말씀드릴 수 있을 정도의 완성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감독판으로 보며 명작의 가치를 느끼시길 추천드립니다.

고맙습니다.